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20세기 연극사에 혁명을 일으킨 부조리극의 대표작입니다. 이 작품은 초연 당시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지만, 캘리포니아 샌퀜틴 교도소 죄수들의 기립박수와 눈물을 이끌어냈습니다.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본능이 공허한 반복 속에서 어떻게 좌절되는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인간 존재의 조건을 가장 냉정하게 응시하는 문학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부조리극이 드러내는 인간 존재의 무의미
부조리극의 '부조리(不條理)'라는 낱말은 인간 존재의 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근본적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으며, 대신 깊은 나락의 염세주의와 기괴한 유머가 독특하게 뒤섞인 형태로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작품 속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고도에게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기다립니다. 심지어 고도가 실존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설정은 인간이 스스로 부여한 목적이 없다면 존재 자체가 얼마나 공허한지를 극단적으로 드러냅니다. 두 주인공은 대화를 나누지만 상호적인 소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마치 서로 벽에 외치는 것처럼 피상적이 되어갑니다. 이는 현대인의 고립된 존재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베케트는 이 작품을 통해 부조리극이라는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장르를 창조했으며, 희곡의 거의 모든 관습적 기대를 철저히 깨뜨렸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이 등장해 이해할 수 없는 허튼소리를 내뱉는 것이 전부이지만, 바로 그 무의미함 속에서 관객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의미를 향한 인간의 집요한 기대가 어떻게 공허 속에서 반복되는지, 이 작품은 그 본질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합니다. 또한 1막과 2막의 반복 구조는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시키며, 벗어날 수 없는 일상과 시간의 굴레를 강조합니다. 끝내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은, 선택을 미루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상징합니다.
사뮈엘 베케트와 노벨문학상
사뮈엘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 집필 이후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 작품이 '별거 없이 고도를 기다렸더니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평하기도 하지만, 이는 작품의 문학사적 가치에 대한 무지에 불과합니다. 베케트는 단순히 한 작품으로 노벨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부조리극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수많은 작품을 통해 현대 문학의 지평을 확장했습니다. 노벨문학상은 작품이 아니라 작가에게 주는 상이므로,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의 대표작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이 작품 하나만으로 수상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작품이 처음 상연되었을 때 일반 대중과 연극 평론가들은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 된다'며 혹평했지만, 캘리포니아 샌퀜틴 교도소의 죄수들은 기립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당시 교도소에서 상연된 이유는 단지 여성 출연자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연출자는 이런 힘 빠지는 부조리극을 보여주면 죄수들이 열받아 폭동을 일으킬 것을 걱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자유를 박탈당한 채 끝없이 무언가를 기다려야 하는 죄수들에게, 고도는 바로 '자유'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작품이 관객의 처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놀라운 힘입니다. 고도가 신(神)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널리 퍼져 있으며, 고도라는 단어가 신을 의미하는 영어와 프랑스어 단어 God과 Dieu의 합성어라는 해석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베케트는 "이 작품에서 신을 찾으려 하지 말라"는 부정에 가까운 뉘앙스의 발언을 남겼으며, 자신조차도 고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기다림
'고도를 기다리며'의 줄거리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로 '기다림'입니다. 1부와 2부의 내용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2부에서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나아진 게 없다는 점에서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여전히 고도는 오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와도 맥이 상통합니다. 두 남자는 한 국도의 작은 나무 옆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지만 제대로 된 대화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한쪽에서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면 다른 쪽은 난 술이 싫다고 동문서답하는 식입니다. 그러던 중 포조와 그의 짐꾼 럭키를 만나 대화를 나누지만, 역시 두서없고 무의미한 대화뿐입니다. 밤이 되자 심부름을 하는 양치기 소년이 나타나 '고도 씨는 내일 온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제2막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그대로 반복되는데, 앙상했던 나무엔 갑자기 잎새가 올라오고, 포조는 오래전에 시력을 잃은 장님이,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 다시 등장합니다. 양치기 소년이 다시 등장했을 때 블라디미르는 소년을 알아보지만, 소년은 자신은 어제 온 적이 없다고 어리둥절해합니다. 블라디미르는 고도 씨에게 가서 자신을 봤었다고 말하라고, 확실히 날 봤지 않냐고 소년을 다그치지만 소년은 겁에 질려 달아납니다. 에스트라공은 차라리 멀리 떠나자고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내일 고도를 만나러 여기 와야 한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두 사람은 나무를 쳐다보며 목이나 맬까 하며 바지의 고무줄로 실험해 보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이제 가기로 결정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고도는 신, 구원, 자유처럼 해석되지만 끝내 오지 않음으로써 인간 존재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한 세계는 침묵할 뿐임을 보여줍니다. 반복되는 상황과 무의미한 대화, 기괴한 유머는 절망을 희화화하면서도 오히려 그 공허를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해답을 제시하지 않지만, 기다림 자체가 인간의 조건임을 냉정하게 응시하게 합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보여주는 무의미한 반복은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방식의 본질적 모습입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지 않는 한, 세상은 영원히 침묵할 것이라는 진실을 극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출처]
나무위키 - 고도를 기다리며: https://namu.wiki/w/%EA%B3%A0%EB%8F%84%EB%A5%BC%20%EA%B8%B0%EB%8B%A4%EB%A6%AC%EB%A9%B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