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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기전체 형식 열전 인간 군상 사마천

by 오루미 2026.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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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관련 사진

중국 역사서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사기》는 단순한 과거 기록이 아닌, 인간과 권력,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의 결정체입니다. 사마천이 궁형이라는 치욕을 감내하며 완성한 이 저작은 이십사사 중 유일한 통사이자 기전체 서술 방식을 확립한 역사서로, 전근대 동아시아 역사 서술의 틀을 만들어냈습니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실패자와 주변인까지 기록한 사마천의 태도는 오늘날에도 역사 서술의 윤리적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사기 기전체 형식

《사기》가 역사학에서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는 바로 기전체 형식을 최초로 완성했다는 점입니다. 기전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나열하는 편년체와 달리, 각 사건과 인물을 개별적으로 독립된 항목에서 다루는 서술 방식입니다. 사마천은 이를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이라는 다섯 가지 체계로 구성했습니다. 이 중 〈본기〉는 천자의 기록, 〈세가〉는 춘추전국시대 및 전한대 제후의 기록, 〈열전〉은 그 밖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사마천이 명분보다 현실을 우선시했다는 사실입니다. 항우는 정식 황제가 아니었음에도 천하를 제패한 패왕으로 인정하여 〈본기〉에 서술했고, 실권 없는 허수아비 황제였던 혜제와 소제 대신 실질적 권력자였던 여태후를 〈본기〉에 배치했습니다. 이는 한무제 시기에 쓰인 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히 과감한 처사였습니다. 또한 제후가 아니었던 공자와 진승을 〈세가〉에 포함시킨 것 역시 파격적이었습니다. 공자가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은 황제들보다 위대했고, 진승은 비록 실패했으나 최초의 농민봉기 지도자로서 역사적 의미가 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서술 태도는 당시 유교적 명분론이 확립되던 시기에 매우 이색적인 것이었습니다. 기전체는 이후 중국 정사 이십四사를 비롯하여 고려의 《삼국사기》, 조선의 《고려사》 등 동아시아 역사서의 표준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열전, 인간 군상을 담은 살아있는 기록

《사기》 중에서도 특히 〈열전〉은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제왕 중심의 〈본기〉가 연표에 따라 다소 딱딱하게 구성된 반면, 〈열전〉은 다양한 인물 군상을 생동감 넘치게 그려냅니다. 사마천은 현장답사를 통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열전〉을 구성했으며, 이는 문학적 가치 또한 높게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사기》에는 무려 1,300여 가지 직업군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마천이 민중과 사회에 대해 얼마나 폭넓은 관심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열전〉에는 항우, 이광, 염파와 같은 무장뿐 아니라 상인, 자객, 협객, 외교관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권력의 부속물이 아니라 고뇌하고 선택하는 주체로 그려지며, 그 속에는 승패를 넘어선 감정과 인간적 한계가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량치차오는 《사기》의 10대 명편으로 〈항우본기〉, 〈위공자열전〉, 〈염파인상여열전〉, 〈노중련추양열전〉, 〈회음후열전〉, 〈위기무안후열전〉, 〈이장군열전〉, 〈흉노열전〉, 〈화식열전〉, 〈태사공자서〉를 선정했는데, 이 중 대부분이 〈열전〉에 속합니다. 루쉰은 《사기》를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요, 운율 없는 이소다"(史家之絶唱, 無韻之離騷)라고 극찬했으며, 조선의 정조 역시 《사기》를 한문 문장의 전범으로 호평하며 《어정사기영선》을 편찬했습니다. 〈열전〉이 더욱 가치 있는 이유는, 여기에 궁형을 겪은 사마천 자신의 분노와 슬픔, 역사에 대한 책임감이 겹쳐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마천, 권력에 맞선 역사가의 용기

사마천은 기원전 108년부터 기원전 91년까지 약 17년에 걸쳐 《사기》를 저술했으며, 그의 아버지 사마담 대부터 자료가 준비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준비 기간은 더욱 깁니다. 그는 상고시대의 황제부터 한무제 태초 연간까지 약 3천 년의 역사를 130권, 52만 6500여 자로 압축했습니다. 단 한 사람이 이렇게 방대한 기간을 다룬 역사서를 쓴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도 드뭅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쓴 동기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가문의 전통인 사관의 소명 의식에 따라 《춘추》를 계승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궁형의 치욕에 발분하여 입신양명으로 대효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저술의 목표를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관하여 일가의 주장을 이루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사마천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을 궁형에 처한 한무제를 비판했습니다. 《삼국지》의 왕윤은 《사기》를 '정부를 헐뜯고 비난하는 방서'라고 비난했지만, 오히려 이는 최고 권력자에게도 서슬 퍼런 역사의 붓을 들이댄 사마천의 용기와 신뢰성을 높게 평가받는 장점이 되었습니다. 사마천은 기본적으로 도가를 중요시했으며, 한대 유교가 내세운 미신적 믿음은 혐오했습니다. 그는 〈태사공자서〉에서 도가를 두고 편애가 느껴질 정도로 극찬했으며, 유가, 법가, 묵가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습니다. 이러한 독립적 사유는 《사기》가 단순한 왕조 찬양서가 아니라 진정한 역사서로 기능할 수 있게 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실패자와 주변인을 기록함으로써 역사 서술의 윤리적 기준을 세웠습니다. 열전에 담긴 인간 군상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인간과 사회를 성찰하게 하는 살아 있는 텍스트입니다. 사마천이 보여준 역사가로서의 용기와 통찰은, 역사란 단순한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 본연에 대한 질문이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출처]
나무위키 - 사기(역사책): https://namu.wiki/w/%EC%82%AC%EA%B8%B0(%EC%97%AD%EC%82%AC%EC%B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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