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원의 장편소설 『천변풍경』은 1930년대 청계천변을 배경으로 15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입니다. 1936년과 1937년 두 차례에 걸쳐 『조광』에 연재된 후 1938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 소설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리얼리즘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뚜렷한 줄거리 대신 일상의 파편들을 섬세하게 포착한 이 작품은 당대 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재현하며 문학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일상 묘사를 통한 서민 삶의 재현
『천변풍경』의 가장 큰 특징은 청계천변 서민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소설은 빨랫터에서 떠들며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으로 시작되며, 이발소집 소년 재봉이가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 민 주사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늙어가는 얼굴을 보며 한숨짓는 모습 등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순간들을 포착합니다. 작품에는 금순-하나꼬-기미꼬 인물군, 민 주사-안성집, 이쁜이, 만돌 어멈, 창수 등 30명 정도의 중심인물들이 등장하며, 이들의 스토리라인을 근간으로 일회적이고 개별적인 사건들이 전개됩니다. 작가 박태원은 특정 인물을 중심에 세우기보다 천변이라는 공간 자체를 주인공처럼 그려냅니다. 그 공간 안에서 상인, 학생, 기생, 실업자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얽히고 흩어지며 도시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여급 하나꼬의 일상, 한약국집에 사는 젊은 내외의 외출, 약국 사환인 창수의 어제와 오늘, 만돌 어멈에 대한 안방마님의 꾸지람 등 각각의 에피소드는 독립적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1930년대 경성의 공기를 자연스럽게 담아냅니다. 특히 여성 인물들의 삶을 통해 당대 사회의 모순이 드러납니다. 카페 여급인 기미꼬는 협기를 발휘하여 금순을 구해주고 친언니처럼 하나꼬를 시종여일하게 위해줍니다. 하나꼬는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느껴 혹독한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의연하게 감내하고자 합니다. 시집살이의 고통으로 자살까지 생각했던 금순이는 동생을 챙겨주며 행복한 일상을 보내게 됩니다. 이쁜이는 봉건적인 가족 관계의 희생이 되는 여인의 수난을 보여줍니다. 어느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간 이쁜이는 고된 시집살이와 남편의 바람기에 지쳐 결국 친정으로 도망 오며, 거의 하루를 넘게 곤히 잠들 정도로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극에 달합니다. 이쁜이의 모친이 혹여 딸이 욕을 먹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얘, 너 그래도 한 번만 꾹 참고..."라며 돌아가기를 권유하자, 이쁜이가 울먹이면서 왜 자신을 여자로 낳아 놨냐고 원망 어린 말을 하는 장면은 당대 여성의 처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 인물군 | 주요 인물 | 서사 특징 |
|---|---|---|
| 금순-하나꼬-기미꼬 | 여급과 서민 여성들 | 협기와 의연함을 보이는 긍정적 인물군 |
| 민 주사-안성집 | 중산층과 첩 | 허영과 생존 전략을 보이는 부정적 인물군 |
| 이쁜이, 만돌 어멈 | 봉건적 가족 관계의 희생자 | 여성의 수난을 보여주는 인물군 |
| 창수 | 시골 소년에서 도시 청년으로 | 도시화의 부정적 측면을 보여주는 입체적 인물 |
모더니즘 기법으로 구현된 형식적 특징
『천변풍경』은 형식적으로 모더니즘 소설의 특성을 잘 구현하고 있습니다.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서로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교차적 서사 구성 방식'이 특징적이며, 작가 자신의 또 다른 작품인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처럼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였기에 '딱 떨어지는 줄거리'가 없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벗어나 일상의 흐름 자체를 재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작품은 한약국집 내외의 행복한 일상, 재봉이와 젊은 이발사 김 서방의 말다툼, 이발사 시험을 볼 재봉이의 희망 등 개별적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제시됩니다. 이러한 구성은 처음에는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인물들의 대화와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그 속에 1930년대 경성의 공기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작가의 관찰력이 빛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소해 보이는 몸짓이나 말투, 거리의 소리까지도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어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최재서 이래 이 작품의 특징으로 강조된 '카메라 아이'를 통한 객관적인 세태 묘사라는 평가도 있지만, 실제로는 서술자의 언어를 통해 주관적이고도 감정적인 판단을 빈번하게 내림으로써 완전한 객관성과는 거리가 먼 양상을 보입니다. 오히려 이는 작가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인물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세 명의 여성 중심인물을 긍정적으로 형상화하고, 특히 금순이가 동생 순동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나 기미꼓가 동료를 도우는 장면에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형식적 실험은 정치·사회적이거나 역사적인 담론과 거리를 둔 채 일상에 주목하는 모더니즘 소설의 한 가지 특성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화려하거나 극적인 장면은 많지 않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이 작품의 매력입니다. '살아간다'는 행위 자체를 담담하게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희망을 발견하게 만듭니다.
시대상 반영과 비역사적 일상의 의미
『천변풍경』이 보여주는 가장 독특한 특징은 당대 서민들의 일상생활에 주목하되 역사성과 사회성을 탈각했다는 점입니다. 작품에는 방대한 인물군이 등장하지만 주의자로서의 지식인도, 식민 지배 세력으로서의 일본인도, 민중을 수탈하는 유산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도 없습니다. 공간 배경을 청계천변으로 한정했지만 공간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도 사회·경제적인 파악도 거의 없습니다. 이는 일견 역사적 현실을 외면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중일전쟁으로 치닫는 식민지 치하에서 비역사적이고 보편적인 일상으로 채워지는 하나의 사회상을 설정하고 그 주인공들에게 긍정적인 시선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가난으로 인한 아픔에 시달립니다. 민 주사는 첩을 두고 노름에 빠져 지내며 부회의원을 꿈꾸는 중산층의 허영과 허세를 보이지만, 결국 선거에서 패배합니다. 그의 돈을 우려내어 전문학교 학생과 육욕을 나누고 미래를 도모하는 안성집의 행태는 그악스러운 여인의 생존 전략을 드러냅니다. 시골 소년의 순진함을 잃고 서울의 유흥을 즐기면서 보다 쉽게 돈을 벌기를 바라는 창수의 변모는 도시화가 주는 부정적인 측면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현실 속에서도 한약국집 관련 인물들을 통해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안정된 중산층의 삶과 행복을 보여줌으로써 대조를 이룹니다. 부부 금슬도 좋고 아이까지 생기는 한약국집 내외의 모습은 천변의 서민들이 겪는 삶의 고단함이나 그 외 중소 상인들이 보이는 향락적인 태도를 대조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는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 시대적 배경 | 1930년대 식민지 조선 |
|---|---|
| 공간적 배경 | 서울 청계천변 |
| 사회적 분위기 | 중산층과 하층민의 가난한 삶과 애환 |
| 문학적 의의 | 비역사적 일상을 통한 저항과 희망의 표현 |
이렇게 엄혹한 사회·경제적 상황이 주는 환멸을 견뎌내고자 하는 자세는, 면면히 이어지는 일상 세태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광풍과도 같은 사건과 사고로 점철되는 정치사를 넘어서 지속되는 '일상으로서의 역사' 차원에서 미래를 긍정하는 것이어서,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문학적 저항으로서의 의미를 띱니다. 급변하는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루를 버텨내고, 그 소소한 삶들이 모여 시대의 풍경을 완성합니다. 거창한 메시지를 앞세우기보다 살아간다는 행위 자체를 담담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천변풍경』은 인물 구성과 서사 구성 모두 비역사적이고 비사회경제적으로 설정하여, 일상의 시공간 속에서 역사성과 사회성에 구애받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대체로 부정적인 일상 세태를 재현하는 한편 주요 인물들의 행복한 삶에의 지향을 드러냅니다. 이는 단순히 현실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격변기에도 변함없이 지속되는 인간 삶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한국 현대문학의 리얼리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일상이라는 보편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희망을 발견하고자 한 작가의 문학적 성취를 보여줍니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1930년대 청계천변이라는 특정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인간 삶의 가치를 발견하게 합니다. 세밀한 일상 묘사, 모더니즘적 형식 실험, 그리고 비역사적 접근을 통한 역설적 저항이라는 세 가지 축이 조화를 이루며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입니다. 결국 이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어떤 시대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 자체가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천변풍경』에서 '카메라 아이' 기법이란 무엇을 의미하나요?
A. '카메라 아이' 기법은 작가가 마치 카메라처럼 객관적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최재서는 이 작품이 이러한 객관적 세태 묘사를 보여준다고 평가했으나, 실제로는 서술자의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판단이 빈번하게 드러나 완전한 객관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인물들에 대한 공감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Q. 작품 속에서 여성 인물들이 겪는 시집살이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A. 하나꼬와 이쁜이로 대표되는 여성 인물들의 시집살이는 1930년대 봉건적 가족 관계 속에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수난을 상징합니다. 특히 이쁜이가 친정으로 돌아와 울먹이며 "왜 나를 여자로 낳았냐"라고 묻는 장면은 당대 여성의 처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는 경제적 가난과 함께 성별로 인한 구조적 억압이 서민 여성들의 삶을 이중으로 짓눌렀음을 드러냅니다.
Q. 『천변풍경』이 역사성과 사회성을 탈각했다는 것은 현실 도피를 의미하나요?
A. 아닙니다. 오히려 중일전쟁으로 치닫는 엄혹한 식민지 시기에 비역사적이고 보편적인 일상에 주목한 것은 역설적인 저항의 의미를 지닙니다. 정치사의 광풍을 넘어 지속되는 '일상으로서의 역사' 차원에서 미래를 긍정함으로써, 부정적 현실에 대한 문학적 저항을 표현한 것입니다. 변함없이 이어지는 일상 속에서 인간 삶의 존엄성을 발견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Q. 작품에 등장하는 150여 명의 인물들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나요?
A. 총 150여 명의 인물 중 30명 정도가 중심인물로 기능하며, 이들은 금순-하나꼬-기미꼬 인물군, 민 주사-안성집 인물군, 이쁜이와 만돌 어멈, 창수 등의 스토리라인으로 조직됩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교차적 서사 구성 방식으로 번갈아 등장하면서 청계천변이라는 공간을 입체적으로 재현합니다. 각 인물군은 독립적인 에피소드를 보여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1930년대 서민 삶의 다양한 단면을 구성합니다.
Q. 한약국집 내외가 작품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A. 한약국집 젊은 내외는 경제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안정된 중산층의 삶과 행복을 보여주는 인물들입니다. 부부 금슬이 좋고 아이까지 생기는 이들의 모습은 천변의 다른 서민들이 겪는 삶의 고단함이나 중소 상인들의 향락적 태도와 대조를 이루며,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가능한 행복한 일상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이는 작가가 부정적 현실 속에서도 긍정적 삶의 가능성을 놓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5884